안중근 의사 기념관: 계속 옮겨 다니는 박물관

헤이룽장성 ·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계속 옮겨 다니는 박물관

하얼빈역 플랫폼에 다섯에서 여섯 걸음 간격으로 놓인 두 개의 표식은 1909년 이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건물은 세워지고 철거되고 다시 지어지며 네 번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원한 무덤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작성 ··약 11분 읽기

하얼빈역 제1플랫폼에는 바닥에 박아 넣은 두 개의 도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삼각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각형입니다. 간격은 다섯에서 여섯 걸음으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정하고 나서 그것을 실행할 때까지 나아가는 거리와 대략 같습니다.

그 위의 현판에는 날짜만 적혀 있습니다. 1909.10.26. 이 장소에 있는 1차 증거는 그것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청동상, 글씨가 늘어선 벽, 아홉 시 반에 멈춘 시계, 창, 그리고 지금까지 네 개의 주소를 써 온 박물관——은 플랫폼의 두 표식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다섯에서 여섯 걸음

삼각형은 안중근이 서 있던 자리를, 사각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쓰러진 자리를 나타냅니다. 지금의 표식에는 나중에 더해진 요소가 있습니다. 삼각형 안의 일곱 개 별은 가슴의 점 일곱 개에서 온 어릴 때 이름 응칠(應七)을 가리키고, 사각형 안의 세 겹 동심원은 세 발을 가리킵니다.

이 장식은 최근의 것입니다. 2006년에 표식이 처음 놓였을 때는 설명이 전혀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에 도형 두 개가 있을 뿐이어서, 아는 사람만 알아보고 나머지는 그 위를 밟고 지나갔습니다. 사건의 이름을 적은 현판은 2014년 기념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리입니다. 저격이 아니었습니다. 붐비는 플랫폼에서, 러시아 의장대 앞에서, 국가적인 환영 행사 중에,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기록에 남은 만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었고, 1905년부터는 초대 한국 통감이었습니다. 통감 직은 1909년 6월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만주와 한반도 문제를 러시아 재무대신 코콥초프와 비공식으로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갔습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의 본거지가 놓인 도시였습니다.

열차는 오전 9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코콥초프가 차 안으로 맞이하러 들어갔습니다. 약 20분 뒤 두 사람은 내려와 환영 행렬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나흘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에 도착해 있던 안중근은 러시아 측 열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틈을 지나 몇 걸음 거리에서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세 발이 이토의 가슴과 배에 맞았습니다. 이토는 열차로 옮겨졌고 약 30분 뒤 사망이 알려졌습니다. 향년 69세였습니다. 안중근은 사람을 잘못 쏘는 일을 피하려고 이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발사했습니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彥), 궁내대신 비서관이며 시인으로는 모리 카이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철도 간부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세 사람입니다. 세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고, 세 사람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안중근은 달아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어로 한국의 독립을 외치고 그 자리에서 러시아 관헌에 붙잡혀 이틀간 억류된 뒤 일본 측에 인도되었습니다.

뤼순, 그리고 다섯 달

안중근은 랴오둥반도 뤼순에 있던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검찰의 신문은 1909년 10월 30일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동기로 이토에 대한 열다섯 가지 죄상을 들었고, 한국 의병 부대에서 계급을 가진 처지라는 이유로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해외 한인 사회가 선임한 변호인에는 영국인과 러시아인 변호사도 있었지만 법정에서의 변호는 허가되지 않았고, 대신 일본인 변호인이 붙었습니다. 일본 측 외교 기록에는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1909년 11월에 이 사건을 일본 형법으로 다루도록 지시하고, 12월에 사형을 구형하도록 전달한 경위가 남아 있습니다.

공판은 1910년 2월에 여섯 차례 열렸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상소해도 소용이 없다는 자기 변호인의 설명을 듣고 2월 19일에 상소를 취하했습니다. 남은 날들은 집필에 썼고, 자서전은 3월 15일에 끝냈습니다. 서양의 제국주의에 맞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손잡아야 한다고 논한 동양평화론 쪽은 끝내지 못했습니다. 몇 달의 여유가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도쿄는 신속한 집행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총살되기를 청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아침, 교수형으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서른 살이었습니다. 천주교 신부 조제프 빌렘은 주교의 지시를 어기고 3월 1일에 감옥을 찾아 고해를 들었고, 그 때문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1993년 서울대교구는 그를 위한 추모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세 정부, 세 개의 동사

이 부분은 기념관이 정리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각 측이 공식적으로 쓰는 낱말입니다.

플랫폼 위쪽의 중국 측 현판은 ‘격폐(擊斃)’, 곧 쏘아 죽였다고 적습니다. 한국에서는 ‘의거(義擧)‘라고 부르고, 기념관의 정식 명칭은 중국어와 한국어 모두 ‘의사(義士)‘라는 말을 포함합니다. 일본의 사전류는 ‘암살(暗殺)‘로 적습니다.

공식 입장도 어휘와 대응합니다. 한국 정부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리며 1962년에 건국훈장의 최고 등급을 추서했습니다. 북한 측 자료도 국가적 인물로 다룹니다. 중국 외교부는 2014년 1월 기념관을 옹호하면서, 그는 널리 알려진 항일 인물이고 중국에서도 존경받으며 국내 규정에 따라 기념 시설을 세우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2014년 1월 20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내각관방장관이 밝힌 것으로, 그는 테러리스트이며 그를 기리는 일은 지역 협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본인의 설명은 신문 기록과 끝내지 못한 논고에 있습니다. 자신은 교전하는 쪽의 장교로서 행동했고 그 뒤에는 한국과 일본이 우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 읽기를 채택한 정부는 없습니다. 그래도 기록에는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찾지 못한 무덤

안중근은 자기 시신에 대해 적어 두었습니다. 하얼빈 공원——지금 다오리구의 자오린 공원(兆麟公園)이라 불리는 곳——에 묻고, 나라가 독립하면 본국으로 옮겨 달라는 내용입니다. 두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은 시신 인도를 청했으나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같은 날 오후 뤼순 감옥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35년 뒤 독립이 왔을 때, 그 자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같은 감옥의 일본인 의사도, 같은 곳에서 처형되어 매장된 다른 수형자의 자손도 감옥 뒷산의 묘에 참배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묘지가 숨겨졌다기보다 관리되지 않아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고 보는 쪽이 기록에 맞습니다. 다른 설도 돌아다닙니다. 관이 덴마크인이 만든 뤼순의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는 1910년 러시아 신문 기사를 근거로 2019년에 한국에서 보도되었습니다. 유해가 일본에 있다는 주장은 2016년에 한국의 작가가 제기한 것입니다. 어느 쪽도 제삼자가 확인할 수 있는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았고, 둘은 서로 양립하지 않습니다.

찾는 쪽의 기록은 충분합니다. 1992년 한중 수교 뒤에 일부 자료가 나왔습니다. 한국과 북한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문헌을 맞춰 보고 감옥에서 공동 조사도 했습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2008년과 2010년에 감옥 북서쪽 약 6,600제곱미터의 산지를 파냈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국 측은 일본 정부에 매장 기록 제공을 반복해 요구했고, 2011년에는 외무대신이 기록을 찾아 넘기겠다는 뜻을 말했지만 그 뒤 진전은 없었습니다.

서울 효창공원(孝昌公園)에는 윤봉길(尹奉吉)과 이봉창(李奉昌)의 묘 옆에 그를 위한 빈 묘가 있습니다. 1946년부터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플랫폼의 첫 표식은 일본 측 것이었다

1909년 뒤 일본 측은 제1플랫폼에 자기들의 표식을 놓았습니다. 옛 지하통로 남쪽 입구에서 약 5미터 되는 자리에 놓인 구리판으로, 내용은 이토가 목숨을 잃은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1플랫폼 대합실 벽 쪽에는 이토의 흉상이 서 있었습니다.

둘 다 1945년 일본의 항복 뒤에 철거되었습니다. 즉 이 플랫폼은 같은 몇 미터의 콘크리트 위에서 두 국가에 의해 서로 반대 방향의 기념을 담아 온 셈입니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30년 남짓의 공백이 있습니다.

2006년, 다른 구에서 열린 전시

지금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역에서 떨어진 곳에서 시작됩니다. 2006년 7월, 다오리구 안성가 85호의 조선민족예술관(朝鮮民族藝術館)이 새 건물을 열고 1층에 안중근 전시를 두었습니다. 2008년 10월에는 한국 국가보훈처의 1억 원으로 한국 독립기념관이 개장 공사를 해 전시가 2층으로 옮겨 다시 열렸습니다. 내부 시공은 하얼빈 측이, 전시와 전시물 제작은 한국 측이 맡았습니다. 당시 보도는 사진 약 90점과 유묵 8점을 포함한 110여 점의 자료가 생애, 국내의 구국 운동, 국외의 의병 활동으로 나뉘어 배치되었고 하얼빈에 머문 11일이 날짜별로 정리되었다고 전했습니다.

2006년의 플랫폼 표식과, 역 2층 철도 발전사 전시 안에 놓인 작은 전시실도 같은 시기의 것입니다. 이 시점에는 아직 기념관이 아니었습니다.

2013년과 2014년: 비석 요청에 건물로 답하다

2013년 6월, 중국을 방문한 한국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시진핑에게 하얼빈역에 안중근의 기념비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013년 11월 19일 중국 외교부는 이 제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은 강한 불만을 표명했습니다.

중국 측은 요청보다 더 나아갔습니다. 비석이 아니라 하얼빈시 인민정부와 하얼빈 철로국이 출자해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조선민족예술관의 전시를 역 안으로 옮겼습니다. 개관은 2014년 1월 19일, 입장은 무료였습니다. 옛 역사의 외관을 되살린 대합실 개조였고, 한쪽 끝에는 바닥까지 내려오는 창이 플랫폼을 향했습니다. 관 밖에는 비둘기와 올리브 가지가 지구를 둘러싼 원형 도안이 개관일 날짜와 함께 놓였습니다.

일본은 이튿날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도쿄 주재 두 나라 대사에게 전화하는 방식으로 베이징과 서울 양쪽에 항의했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기념관을 환영했습니다. 헤이룽장성 부성장은 국영 통신에 외교적 다툼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더 소중히 여기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창이 하나 있는 방 하나를 놓고 나흘간 성명이 오간 셈입니다.

역이 새로 지어지고, 박물관은 또 움직였다

하얼빈역은 여덟 면의 플랫폼을 가진 운행 중인 터미널로, 베이징, 만저우리, 쑤이펀허, 치치하얼, 자무쓰, 무단장 방면으로 열차가 나갑니다. 2010년대 중반 시는 1903년 역사의 아르누보 양식으로 이 역을 다시 지었습니다. 투자액은 65억 위안 남짓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 공사로 옛 역사는 2017년 8월 30일에 닫혔고, 새 북역사가 이튿날 아침에 열렸으며 남역사는 2018년 12월에 이어졌습니다. 기념관은 그동안 조선민족예술관으로 돌아갔다가 2019년 3월 30일 역 남광장에서 다시 열었습니다. 당시 그 공백은 두 해에 가깝다고 표현되었습니다. 재개관 식은 없었습니다. 지역지 하얼빈일보의 짧은 광고가 그 알림이었습니다.

지금의 관은 한반도 지도 위에 서 있는 전신 청동상으로 시작합니다. 한 손은 모자를 들고, 다른 손은 1909년 초 동지들과 피로 맹세할 때 끊은 손가락 관절을 보입니다. 상 위의 시계는 9시 30분에 멈춰 있습니다. 전시는 출생, 성장과 교육, 의병, 하얼빈, 법정, 마지막 말로 이어집니다. 끝에는 돌계단이 놓인 전망대가 있어 창으로 복원된 플랫폼 표식이 보입니다. 관내 바닥에도 같은 간격으로 두 도형이 놓여 있어, 그 거리를 직접 걸어 볼 수 있습니다.

우연인지 아닌지, 2019년 3월 30일은 충칭에서 복원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공개된 날이기도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반대쪽 끝에 있는 곳입니다.

관 안에 서서

30분에서 45분을 잡으면 됩니다. 해설은 중국어와 한국어입니다. 관은 작고, 가장 강한 전시물은 물건이 아닙니다. 창이고, 그 너머의 플랫폼이 지금도 매일 쓰이며 그 지점 위로 열차와 승객이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2019년 재개관 때 한국에서 온 대학생은 전시 면적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내용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였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온 한국의 전 공군참모총장은 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념관이 어디냐고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관람 준비에 도움이 됩니다. 여기는 교통 시설에 붙은 한 칸 규모의 시립 전시이고, 그 외교사에서 짐작할 만한 안내 표지는 붙어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두 곳은 함께 볼 만합니다. 다오리구의 자오린 공원은 그가 유언에서 매장지로 지정한 하얼빈 공원이며, 우덕순(禹德淳)과 계획을 논의하고 남문 밖 사진관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고 기록된 곳입니다. 그리고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는 같은 주제의 10년 뒤, 2,00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한쪽 끝입니다.

하얼빈이 러시아 철도에서 비롯한 도시라는 배경은 이 모든 것의 밑바탕이며 중앙대가성 소피아에서 다뤘습니다. 여기서는 한 문장으로 충분합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 것은 중국의 도시에 러시아 철도 행정의 본거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일본의 정치가와 러시아의 대신이 한국인이 사증 없이 갈 수 있는 플랫폼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은 대체물의 연속입니다. 표식은 아무도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사건을 대신해 서 있습니다. 관은 대부분의 관람객이 밟을 수 없는 표식을 대신합니다. 효창공원의 빈 묘는 네 차례 발굴로도 찾지 못한 시신을 대신합니다. 역 자체도 이전 역을 다시 만든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은 것은 플랫폼의 두 도형 사이 거리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터가 아니라 걸음으로 재어지는데, 이 일에 대해 누구도 가지지 못한 가장 정확한 단위가 실은 그것입니다.


LoreLens 앱은 하얼빈 곳곳의 기념 표식과 명판, 박물관 건축을 식별하고 그 연대와 결정의 경위를 설명해 줍니다.

위치 정보

한눈에 보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위치가 표시된 중국 지도
중국 내 안중근 의사 기념관 위치 · 45.759329, 126.626744

Google 지도는 중국 본토에서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Apple 지도는 현지 라이선스 데이터를 사용하므로 중국 내에서도 작동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기념관은 정확히 어디에 있고, 승차권이 필요한가요?

승차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2019년 3월 이후 기념관은 하얼빈역 남광장 쪽, 개찰구 바깥에 있습니다. 재개관 당시 중국 측 보도는 남역사를 나와 오른쪽에 있는 측면 문이 입구이며, 역사 정면에는 안내 표지가 없어 처음 오면 찾기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입장은 2014년 개관 때부터 무료입니다. 제1플랫폼의 바닥 표식 두 개는 개찰구 안쪽에 있어서, 대부분의 관람객은 관내 창을 통해 보게 됩니다. 관내 바닥에도 같은 간격으로 두 도형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설은 개관일과 시간, 사전 예약 필요 여부가 그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고 안정된 형태로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정을 짜기 전에 당일 역이나 관의 공지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기념관은 왜 문을 닫았고, 언제 다시 열었나요?

주변 역이 새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얼빈역은 2010년대 중반 전면 개축에 들어갔고, 옛 역사는 2017년 8월 30일에 닫혔으며 이튿날 새 북역사가 열렸고 남역사는 2018년 12월에 이어졌습니다. 옛 역사의 대합실을 고쳐 만들었던 기념관은 그 기간에 다오리구의 조선민족예술관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역 남광장에서의 재개관은 2019년 3월 30일이며, 당시 보도는 그 공백을 두 해에 가깝다고 표현했습니다. 식은 없었습니다. 성과 시의 고위 인사가 참석한 2014년 개관과 달리, 지역 신문에 실린 짧은 광고가 유일한 알림이었습니다.

여기는 중국의 A급 관광지에 들어가나요?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기념관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도, 5A나 4A로 인용되는 중국의 국가 A급 관광지 체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곳 모두 등급이 부여된 관광지가 아니라 박물관입니다. 이곳은 하얼빈시 관계 부문과 철도 측이 함께 관리하고 입장이 무료이며, 표로 구획된 부지가 아니라 운행 중인 철도 터미널의 영역 안에 놓여 있습니다. 등급이 없다는 사실은 이 장소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고, 그 등급 제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안중근의 묘는 어디에 있나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본인은 하얼빈 공원, 지금의 자오린 공원에 묻고 나라가 독립하면 본국으로 옮겨 달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처형 당일인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이후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국교를 맺은 뒤 일부 자료가 나왔고, 한국과 북한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문헌 조사를 진행하고 뤼순에서 공동 현지 조사도 했습니다. 한국 측은 2008년과 2010년에 감옥 북서쪽 약 6,600제곱미터의 산지를 발굴했습니다. 유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윤봉길과 이봉창의 묘 옆에 그를 위한 빈 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출처 및 더 읽을거리

이 가이드의 역사 서술과 지명에 대한 참고 자료입니다. 운영 시간, 입장권, 접근 방법은 자주 바뀌므로 방문 전에 현지 공식 정보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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